기타 유의미한 글쓰기 활동

날개, 최소 공백 80퍼센트의.

明瑛日 2020. 11. 29. 21:12

(2020 문예창작부 한행 겨울 문집 투고)

 

  글을 쓰고 싶다-하는 생각이 든 건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가끔 시를 끄적거리고 싶었던 적은 더러 있었다만 장문의 글은 오래간만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 문체는 나도 알지 못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글을 읽으면서 그 글에서 마음에 드는 것들을 하나씩 따와서 내 글에 넣기 시작했고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는 글을 잘 쓴다는 말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늘 그런 말을 듣고 살았고 늘 글쓰기 대회 상을 받고 살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가끔 내 글의 소재들은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나는 그걸 수필이든 소설이든 멋드러진 말로 풀어낼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내게는 시적 허용이니 문학적 허용이니 하는 건 썩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존재이다. 한컴오피스 한글 이 기계적인 하늘색 프로그램은 ‘멋드러진’이라는 단어를 맞춤법 오류라고 콕 짚어 붉은 점선으로 밑줄을 쳐놓는다. 기분이 제법 별로다. 가장 첫 번째 줄에서 그것은 ‘끄적거리고’를 짚어낸다. 이것 또한 기분이 제법 별로다. 어쩌면 나는 너무나도 정형화되어 있고 틀에 박혀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들여쓰기 10.0포인트, 최소 공백 80퍼센트, 글꼴은 Kopub 바탕체 Medium에 자간 –10.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지.

  아무튼 내가 이렇게 갑작스레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상의 “날개”를 읽으면서이다. 선생님의 줄거리를-선생님은 그것을 ‘아웃라인(outline)’이라고 읽으셨고, 선생님의 발음 탓인지 그건 ‘아웃라인’보다는 ‘아웉라인’이라고 써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비문이라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들으면서 참 이 글은 기괴하다 느꼈다. 어쩌면 기괴하다고 느낀 것도 이전에 누군가가 이상의 “날개”를 기괴하다 평한 걸 읽은 적이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느껴졌다.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아 이게 천재의 비애라는 것일까 하는 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천재의 비애가 무엇인가 내게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의 첫머리부터가 박제된 천재를 아는가 하는 물음이 아닌가. 박제된 천재라고. 하하. 잠시 사고하는 듯하고 다시 내리읽는-사실 내리읽는다는 표현도 이 글에서 쓰인 표현-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돋아라, 돋아라. 나의 날개는 어디로 갔을까. 문득 등허리에 손을 대어 보았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날개. 그 흔적만이 남아 있는 뼈 덩어리가 만져진다. 나의 날개는 어디로 갔을까. 내 글은 내가 싫어하는, 아주 증오하는 이에게 영향을 받은 바가 적지 않다. 그 아이의 어휘들을 동경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것 같다고 느낀다. 그 아이가 읽은 책의 권수에 비례할 테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증오한다.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연유로 그 아이를 증오한다. 그 아이의 날개는 잘려 나갔다. 등에서는 잘려 나간 날개의 자욱으로 피가 흘러내린다.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서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 그 이의 잘려나간 날개는 적개심을 품고 내게 달려들었는지도 모른다. 감정은 전이가 빠르다 하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는 것을 증오한다. 타인의 영향으로 변해가는 나를 보는 것을 증오한다. 나는 나이고 싶은 것이고 이건 누구나의 바람이지만 나는 유독 더 그렇다고 느낀다. 당신은 나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날개”의 주인공은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날개를 펼치려 하고 나는 방 안에서 나를 자유롭게 놓겠다는 노래를 부른다. 스칼릿 조핸슨의 Set It All Free. 문득 그의 날갯짓이 나와 노래-짓과 겹쳐 보이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속물이 되어 버렸다. 이 속물 같은 세상의 세속적인 가치에 물들고 싶지 않았는데 이 세상의 가치들이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의 ‘속물성화’라는 것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이면 나는 샤오미 중국산 가방 하나에 책과 노트, 펜과 샤프 두어 개를 들고 집에서 삼 분 거리의 학원으로 향한다. 나는 그 학원의 선생님을 존경한다. 그 선생님의 모든 면을 존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선생님의 강사라는 업으로써의 능력을 존경한다. 아무튼 나는 그 학원에서 선생님께 귀에 피가 나도록 듣는다. 공부만 하며 다른 걱정 없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이 시기가 조금만 더-정확히는 1년 정도만 더-지나서 끝이 나버리면 내가 내던져질 사회는 어떤 곳인지. 사회는 참 각박하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꾼다. 그 사회에서 기필코 아등바등 살아남아 버티고 성공해 내겠다고.

  문득 낮에 덜 마셔 남겨둔 딸기 우유가 떠오른다. 저녁의 허기짐을 간파해 남겨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마저도 꺼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갑작스레 타자를 치는 내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생일이 멀지 않다. 일 년 전 생일엔 울었다. 어쩌면 내 십팔 년 인생 최악의 생일. 많은 이에게 축복을 받고 중요한 이에게서 잊힌 것만 같던 생일. 모든 게 내 선택에서 비롯한 일이었지만 그러했다. 그래도 나는 이번 나의 생일을 기다린다. 기념일이니 하는 유치한 것들이 참 좋다. 챙길 게 있다는 건, 챙길 내가 있다는 건 참 그래도 좋은 일이다. 이렇게 속물적인 사람이지만 그래도 챙겨줄 내가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딸기 파티 케이크를 하나 주문하고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래 정말 즐거운 날이다. 생각도 없이 속도 없이 좋아라 하는 멍청한 모습. 딱 질색이다.

  내게 생각하는 힘을 주시겠습니까. 언제부턴가 사유함을 잊고 살아가는 것만 같아 내게 성을 낸다. 건축함과 거주함은 필히 사유함을 동반한다고 하이데거는 말했고 나는 이제 거주함을 잃어 나가는 것일까. 내게 생각하는 힘을 주시겠습니까.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이 엉터리 같은 자음과 모음과 문장 부호 그리고 공백의 조합들이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쓰고 있는 게다. 아마 어디선가 들어본 자동기술법이니-사실 이것도 이상의 “날개”-하는 것과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와 어디선가 읽어본 문체로 어른스러운 척하며 써내려 가고 있는 것일 테다. 생각하는 힘을 주시겠습니까, 부디. 생각이 많으면 일찍 죽는다 소리치던 그 어린 날에 나는 참 생각이 많았는데……. 그래서 내게서 깊게 사유하는 법을 빼앗아 가셨습니까. 내게는 종교가 없습니다. 다만 나는 무기력함 앞에서 종교를 찾고 유일신을 여럿 찾고……. 하지만 나는 필연적으로 이겨 나갈 것이고 버텨 나갈 것이다. 나는 한낱 뉴런의 조작 짓거리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겠다. 이를 나는 써내려 간다. 들여쓰기 10.0포인트, 최소 공백 80퍼센트, 글꼴은 Kopub 바탕체 Medium에 자간 –10, 이 정형화된 공간에 또 써내려 간다. 철없던 시절의 나를 회고하며 나아간다, 등짝에는 날개 한 쌍을 온전히 달고. 알 수 없는 이 글을 써내려 간다. 내 등에는 날개가 있다. 아주 온전하게 비상할 준비를 끝마친 날개가 있다.